음식의 거리

어시장 — 에도의 번영을 상징하다

에도시대의 어시장


‘어시장’은 니혼바시 다리에서 에도바시 다리까지, 니혼바시 강의 북쪽 강기슭을 따라 혼후나초에서 혼오다와라초까지의 일대(현재의 니혼바시 혼초 1초메, 니혼바시 무로마치 1초메)에 있었다. 17세기 초에 개설되어 1935년 쓰키지 시장으로 이전되기까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에도와 도쿄 사람들의 식생활을 책임져 왔다.


시장으로 집하된 수산물은 에도 근해를 포함하여 보슈, 가즈사, 시모후사(지바현), 소슈(가나가와현), 엔슈 및 즈슈(시즈오카현) 등에서 잡아 올린 바닷물고기와 민물고기였고, 에도의 거주민인 무사와 서민들의 배를 채웠다.
최초로 어시장을 연 것은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오사카에서 에도로 이주한 모리 마고에몬 일가와 그 부하의 어민들이었다. 그들은 막부나 다이묘에게 도미※ 등의 생선을 우선적으로 헌상하는 대신, 나머지 어패류를 시중에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고 한다. 모리 일가를 이어 후에 어시장에서 개업한 야마토야 스케고로는 슨슈(시즈오카현) 어민들에게 자본금을 대출해 주고 바닷속에 그물을 쳐서 활어장을 설치하게 함으로, 막부와 다이묘에게 올리는 헌상용 생선을 대량 수주하였고 유력한 어상이 되었다.

※도미는 경사스러운 날에 오르는 귀한 생선으로, 일본인의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여겨져 왔다.

17세기 초반, 에도의 인구는 15만 명에 이르러 어패류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에도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면서 어시장도 크게 발전했다. 18세기 전반의 기록에 의하면, 어패류의 도매상, 중개인, 판매업자의 수가 혼후나초 조합, 혼오다와라초 조합, 혼후나초요코다나 조합, 안진초 조합의 4개 그룹으로 총 500명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막부의 식탁을 책임지는 일은 어업 상인으로서는 영예로운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금이 시중 시세보다 턱없이 낮아 거래할 때마다 손실이 컸다. 큼직한 고급어 ‘도미’의 경우, 막부에 상납하는 가격은 시중 가격의 5~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시장의 도매상들은 막부에게 손실 보상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8세기 초반에는 니혼바시, 간다, 요쓰야, 아카사카 등 11개소에 조성지를 하사받아 그 땅의 수입으로 손실을 보충하였다.


魚河岸

19세기의 어시장

17세기 전기의 어시장의 모습은 에도시대의 지도 병풍인 ‘에도즈뵤부’에, 19세기 전반의 모습은 에도시대의 지리책인 ‘에도메이쇼즈에’에 그려져 있다. 아침저녁으로 다양한 어패류가 대량으로 포획되어 점포 앞에 진열되고 위세 등등하게 거래되었다. ‘에도 명소도회’에 그려진 생선을 진열해 놓은 가판대는 ‘이타부네’라고도 하는데, 대부분 유력 상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타부네’에는 각각의 판매권이 있어서 이를 하나 또는 몇 개 빌려 장사를 하는 소규모 상인도 많았다. 이 이타부네는 처음에는 강기슭 노천에 설치되었지만, 시장이 발전하면서 강변 길가에 생선을 저장할 헛간이 세워져 그 헛간 밑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혼후나초에서 혼오다와라초의 상점 앞 가로까지 점용하게 되었다.
어시장은 니혼바시 지역에 1656년까지 있었던 ‘요시와라유카쿠’와 1842년까지 있었던 ‘가부키고야’의 사카이초, 후키야초(현재의 니혼바시 닌교초 3초메 근처)와 함께 ‘하루 천 냥※’이라고 불린 에도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부지는 폭 1간(약 1.8m)* 길이 20간(약 36m)에 천 냥이라는 높은 가격이 붙었다.

※냥은 에도시대의 화폐 단위.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1000량은 현재 약 1억 3000만 엔에 상당한다.

어시장의 유력 도매상은 풍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가부키, 서화, 우키요에, 하이카이 등 에도 문화의 스폰서가 되거나, 집안에서 많은 학자나 문화인을 배출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쿠의 시인 ‘마쓰오 바쇼’의 경제적 후원자이자 바쇼의 제자인 스기야마 산푸는 막부에 상납을 담당하는 잉어 도매 상인이었다.


SONY DSC

니혼바시 어시장 기념비

어시장은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도쿄인의 식탁에 전국의 어패류를 집하하고 공급하였다. 이후 1923의 관동 대지진의 피재를 계기로, 도쿄 개조 계획으로 인해 쓰키지로의 이전이 정해졌다. 그러나, 니혼바시의 이전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이전 완료까지는 결정 후 10수 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