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문화

17세기의 대도시 계획―에도의 마을 만들기

1608년경의 에도


16세기 말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경했을 당시, 에도에는 1457년에 세워진 중세 이래의 에도성과 전란으로 황폐된 성하 마을, 항구를 둘러싼 취락과 주변의 마을이 있는 정도로, 이에야스와 많은 가신단이 거주하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었다.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성의 확충에 착수하여 건축 자재나 저장한 쌀 등을 배를 이용해 에도만에서 성까지 직접 옮기기 위한 수로를 만들었고, 성의 수로 공사 때 개착한 흙으로 바다로 연결되는 히비야의 후미를 매립했다. 성 주위로는 가신단의 저택을 배치했다. 그리고 도키와바시몬 성문 밖에서 동쪽의 아사쿠사 방면으로 향하는 가도를 따라 혼초의 마을 구획 정리를 실시했다. 혼초란 ‘에도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도로는 폭을 약 12m로 만들고 도로의 남북 양측으로는 가로세로 약 120m의 넓은 시가지를 조성하여 이 마을에 상인을 거주시켰다. 금화를 만들던 관청인 긴자나 시정을 담당하던 마치도시요리 등의 저택도 이 혼초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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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가 1603년에 세이타이쇼군이 되어 막부를 열면서, 에도를 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도시 계획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덴카부신’이라고 불렸고, 전국의 다이묘에게는 대규모 토목 공사인 ‘데쓰다이후신’이 부과되었다. 주로 서일본의 다이묘에게는 센고쿠후라고 하여 영지 천 석당 인부 10명의 노역 공출을 명할 수 있었다. 이 때 간다산을 허물어뜨려 사주나 간석 등의 저습지를 매립했고, 하마초에서 신바시까지 마을을 만들기 위한 광대한 시가지를 조성했다. 이 공사로 성곽 확충용의 수로를 동쪽으로 연장해 니혼바시강을 형성하였고 니혼바시 다리를 가설하였다. 1604년에는 이 니혼바시에 5개 가도의 기점이 설정되었다. 또한 에도성 확충 공사로 인해 성 둘레나 옛 성문 앞에 있던 마을 다카라다무라, 지요다무라 및 히라카와텐진, 산노샤, 간다묘진, 니치린지 등의 사원과 신사를 주변으로 이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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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조성된 토지는 모든 다이묘나 막부의 직속 무사인 하타모토의 저택이나 이전한 사찰의 대체지가 되는 등, 니혼바시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신바시, 교바시, 니혼바시, 간다를 가로지르는 번화가가 조성되었고 그 주변으로는 주거 마을들이 할당되었다. 특히 니혼바시의 남북으로 도리초와 무로마치에서 간다까지의 지역은 이미 개발된 혼마치도리와 함께 여러 지방의 상인들과 장인들이 집단으로 주거하여, 막부와 다이묘가 필요로 하는 물자나 노역을 조달하는 서민들의 주거지가 되었고, 높은 지대의 야마노테에 형성된 무사들의 주거지와는 달리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시타마치’라고 불렸다. 이때 설립된 에도의 마을로는 스루가초, 오와리초, 가가초, 이나바초 등 고대 국명을 따서 붙인 마을이 있는데, 실은 각 토목 공사를 담당한 다이묘의 국명을 그대로 붙인 것이었다. 또한 자이모쿠초, 혼고쿠초, 뎃뽀초, 혼카와야초, 가네후키초, 곤야초, 오케초 등의 마을명은 막부에 상납을 담당하던 상인 및 직공이 거주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 하여 1640년경까지 에도는 천하의 조카마치로서 초기 정비를 끝냈지만, 이것은 군사 도시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당시 에도 시가지의 이미지는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의 ‘에도즈뵤부’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에도의 도시 구조가 근본적으로 개조된 것은 1657년의 ‘메이레키 대화재’ 때였다. 이 대화재로 에도 시가지의 거의 60%가 불에 탔는데, 막부는 이를 계기로 에도의 마을을 방재 도시로 만들기 위한 구조적 전환을 도모했다. 도로 확장, 방화용 제방, 시 중심에서 스미다 강 동쪽 연안으로 건너는 료고쿠바시의 가교 건설, 쓰키지 지역의 매립, 료고쿠와 에도바시의 가도 설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저택 이전 재배치, 절과 신사의 주변부로의 이전 등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에도의 시가지는 크게 확대되어 18세기 이후에는 인구 100만의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